부활, ‘40:1’ 고린도전서 15:16-19
오늘은 부활절,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나도 부활하여 주님과 같이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核心)이라면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精髓)요 전부(全部)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이 있을 수 없고,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는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늘 한가지 생각을 합니다. 왜 우리는 부활절을 앞에 두고 40일이라는 사순절 동안 주님의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을 묵상하면서도 정작 부활을 더 많이, 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왜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금식도 하고 눈물도 흘리면서 부활절은 단 하루만 지키면서 사순절의 1/40 만큼만 부활하신 주님을 기리고 기뻐한다고 하는 것일까? 사순절의 십자가 묵상이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부터도 너무나 가볍고 짧은 부활 신앙의 되새김이 의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말합니다. <‘40:1’-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부활 신앙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실로 유감입니다. 우리는 오늘 반성하며 다시 생각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라보고 또 바라봐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다만 유대 한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 수치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전히 죄에 빠져 절망의 수렁을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두운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살 뿐, 영광의 나라를 전혀 소망하지도 기대하지도 못하며 불쌍한 신세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진실로 망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십자가 부활로 살 소망이 생겼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망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이 부활 신앙인데 십자가 묵상을 계속하되 그 무게만큼 부활 신앙, 부활의 영광, 부활의 소망, 부활의 기쁨도 동시에 항상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하며 늘 묵상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소망의 근거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벧전 1:21)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다 하세요. 못할 게 뭐란 말입니까?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세요. 인생을 긍정하고 원하는 것을 성취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지만 그 속에 예수 부활이 없으면, 부활 신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면, 전부 인간적인 노력일 뿐입니다. 나 자신을 믿고, 인류, 인간 세상에 대한 소망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생명의 영광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부활이 우리가 잘 사는 길이요,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이유이고, 인생을 긍정하며 적극적인 생각과 태도로 사는 근거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근거가 있는 바람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 안에 세상이 주는 근거가 없는 싸구려 소망,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의 자리에 내어 주시고 부활의 자리에까지 불러 올리신 하나님이라는 대상이 있는 산 소망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구하는 것마다 얻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그저 기쁜 것이고, 그분과 같이 사니까 그분에 대한 이야기가 줄줄줄 나오는 것이고, 나도 모르게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 소망의 근거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께 있습니다. 아멘!